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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투에 대해 알아보기
과달카날 해전
과달카날은 남태평양에 위치한 무인도로서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은 과달카날을 남태평양 제해권의 거점으로 삼으려 하고, 미국도 이 작은 섬을 마음에 들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1942년 8월 일본군이 과달카날 요새를 계속 강화하는 동안 미군도 과달카날 공격 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르면 미군은 어느 날 이른 아침 과달카날 해수면에 조용히 도착했고, 섬에 잠들어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이용해 공격을 감행해 교두보를 빠르게 점령했다.
잠자고 있던 수많은 일본군이 눈을 뜨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고, 군사 목표물은 하나둘 파괴됐다.
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섬 깊숙한 곳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공항을 건설하던 일본 공병들은 서둘러 섬의 울창한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후퇴했다.
양측이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미군은 두 차례의 공중전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뒤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일본 함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섬에 있는 미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은 기습공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 주력 항공모함의 항공기로 미국 항공모함을 침몰시키려는 적을 유인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 계획은 뜻밖에도 미국 정찰기와 호주 관측소에 의해 발견됐다. 미군은 태스크포스 61을 파견해 과달카날 작전의 두 번째 대규모 해전을 남동해역에서 전개했다. 과달카날.
이로 인해 일본 항공기 90대가 격파되었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급히 후퇴했다.
과달카날에 강제 상륙한 일본군을 마주한 미군은 진지 뒤에 숨은 대전차포로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사격을 가했고, 그 결과 일본군 종대 전체가 쓰러졌다.
10월 25일 저녁, 일본군은 '최종 필사적 공격'을 재편했지만, 여전히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과달카날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30회가 넘는 해전을 벌였고,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셀 수 없이 치열한 진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결국 과달카날을 포기했다. . 이후 일본군은 태평양 전장에서 전략적 공세에서 전략적 방어로 전환했고, 미군이 전략적으로 주도권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