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재경 문답 - 창더 전투 소개: 우성완이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창더성을 방어했습니다.
창더 전투 소개: 우성완이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창더성을 방어했습니다.
1943년 11월 초, 일본군은 윈난성에서 중국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제6전구와 제9전구가 만나는 창더 지역에 공세를 펼쳤다. 일본 제11군은 5개 사단과 10만명 이상의 괴뢰군을 모아 130여대의 항공기를 파견해 요코야마 이사무 사령관의 지휘 아래 중국군을 공격했다. 중국 수비군은 16개 군, 43개 사단, 6, 9전구에서 1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21만 명을 모아 창더시와 주변 지역의 적과 교전했다.
11월 3일, 제74군 제57사단 사령관 유성완(宇泉wan)은 병력을 이끌고 창더성(長德省)에 진입해 재빨리 성내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요새를 구축하며 일본군과 맞설 준비를 했다. 일본군은 항공기와 포병을 이용해 창더 수비군을 맹렬하게 폭격하고, 독가스 폭탄과 소이탄을 발사했으며, 수많은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군의 광적인 공격에 맞서 제57사단 장병들은 위치에 충실하여 필사적으로 도시를 방어하였고, 9,000여 명의 장병들과 함께 16일 밤낮으로 분투하였다. 사단 중 100 명 미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12월 3일, 창더(長德)가 함락되었다.
창덕전투는 일본의 전략적 공세를 막고 중국 주력군의 주도권을 얻어 적의 역포위를 완성했다. 창더성 공방전 당시 20만 명이 넘는 중국군이 창더 외곽에서 10만 명이 넘는 일본 괴뢰군과 치열하게 싸웠고, 창더를 침공하려던 일본 제13사단은 창더 북서쪽에서 굳건히 봉쇄됐다. 12월 9일 구출에 돌입한 제9전구사령부 4군은 일본군을 격파하고 창더를 단숨에 탈환했다. 동시에 제6전역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적군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야 했고 전략적 공세는 실패했다.
창더전투는 중국의 항일전쟁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전반에 걸쳐 일정한 역할을 했던 정면 전장의 대규모 전투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