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경제 뉴스 - 1938년 타이얼좡 전투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1938년 타이얼좡 전투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1. 서주전투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를 중심으로 진포(천진~푸커우)와 용해(보계~연운항) 철도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방어전이다. 그 중에서도 1938년 3월과 4월에 벌어진 태얼장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이 전투는 역사상 1만여 명의 일본군을 포위하고 전멸시킨 사건이다. 쉬저우 전투는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일본군 공세 속도를 크게 지연시켰으며, 중국이 우한 전투를 전개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2. 1938년 3월 우창에서 국민당 임시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항일전쟁과 건국의제'를 채택하고, 항전구국의 총방침을 확정하고, 지도체제를 개편하고, 대통령제를 실시하며, 장개석을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민당 주석으로서 회의에서도 국민정치참여회의에 대한 결의가 있었습니다. 이 회의는 정부 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태얼장 전투, 루난 전투, 또는 태얼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도 알려진 타이얼좡의 대승리. 태얼장 전투의 시작 시기와 끝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1938년 3월 16일에 시작하여 4월 15일에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는 등현전투, 임의전투, 태얼장전투, 일본군의 후퇴, 청나라군의 추격으로 구성되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치열한 전투에는 중국군 약 29만 명, 일본군 약 5만 명이 참가했다. 중국군은 약 50,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약 2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4. 마오쩌둥은 옌안항일전쟁연구회의에서 '장기전쟁에 대하여'를 주제로 연설했다. 마오쩌둥은 항일전쟁 초기의 경험을 정리한 기초 위에서 중국 국민당 내 일부가 주장하는 '중국의 멸망론', '중국의 조속한 승리론'과 '중국의 조속한 승리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게릴라전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장기전을 벌이겠다는 중국의 전략을 세웠다.

'장기적인 전쟁에 대하여'는 항일전쟁의 발전 법칙을 보여주고, 항일전쟁에서 승리로 가는 길을 밝히며, 항일전쟁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비판한다. 이 사업은 전당, 군대,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항전전쟁 승리에 대한 중국인민의 자신감을 강화하였으며, 민족항전전쟁을 지도하는 이론적 강령으로 작용하였다.

5. 우한 전투는 항일전쟁 당시 우한 지역에서 중국군과 일본 침략자들이 벌인 전투이다. 민국 27년(1938년) 6월부터 10월까지 중국 제5전구군과 제9전구군은 장강 남북 기슭을 따라 우한 외곽에 배치됐다. 안후이(Anhui), 허난(Henan), 장시(Jangxi), 호북(Hubei)의 전투는 항일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략적 방어 단계는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길고, 가장 파괴적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 4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257,000명 이상의 일본군이 죽고 부상당해 일본군의 전력을 크게 소모했다. 일본군은 우한을 점령했지만, 빠른 승리로 전쟁을 끝내고 국민당 정부를 항복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는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중국의 항일전쟁은 전략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참고: 바이두백과사전-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