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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사단장의 결말은?

180사단장은 강등됐다가 어느 정도 진급했다가 퇴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

제180사단 사령관은 1913년 안후이성 진자이현에서 태어난 정치구이(鄭秀衣)다.

1951년 3월, 의용군 제60군 제180사단은 압록강을 건너 극도로 비극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5차 전투가 벌어졌고, 180사단은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전투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선이 너무 길어지고 병참 보급이 따라오지 못하자, 나중에 5차 전투가 종료되고 군대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180사단은 주력군의 퇴각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미군의 급속한 침투로 병력은 깊숙이 포위돼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에 진입할 당시 사단 전체 병력은 11,000명이 넘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복귀한 병력은 4,000여 명에 불과했고, 거의 7,000명이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포로가 됐다.

정치구이는 사단장으로서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는 사단장직에서 즉시 해임됐다. 심사를 거쳐 정화구이(鄭秀衣)는 3군단 관리실장으로 임명됐고, 전체 사단급에서 전체 연대급으로 강등됐다. 1955년 정계구이(鄭秀衣)는 대령으로 진급되었고 나중에는 고위 대령으로 승진했다. 1982년 정치구이는 베테랑 적군과 부군장교의 월급을 받고 퇴역하고 말년을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보냈다. 추가 정보

또한 180사단 정치위원 우성더(항미원조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최고장군)도 살아남았으나 미군에 포로로 잡혀 송환됐다. 휴전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180사단 정치위원 우청더는 1912년에 태어나 산시성 신장현 출신이다. 오성덕은 어릴 때 고향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팔로군에 입대하여 10여년의 전쟁 끝에 점차 평범한 군인에서 우리의 뛰어난 장군으로 성장했습니다. 군대.

항미원조전쟁이 발발한 후 우성더는 제180사단 정치위원 대행 및 정치국장으로 임명됐다. 180사단은 나중에 해체되었고, 우청더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적진 뒤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14개월 후 미국 산악 수색대에 포로가 되었고, 그는 의용군에서 포로로 잡힌 최고 장군이 되었습니다.

한국 휴전 이후 우성더는 본국으로 송환됐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 당과 군에서 추방되고 농장 부국장으로 전보됐다. 1982년 3월이 되어서야 우성더는 당원 자격을 되찾았고 옛 적군과 군 간부들의 대우를 즐겼습니다. 말년에 오승덕은 고향인 산시(山西)로 돌아가 운성요양소에서 말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