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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의 전후시기
1945년(쇼와 20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했다. 미군은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실제 군주제에서 가상 군주제로 바꾸었다.
일본의 항복 칙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쇼와 천황이 신임했던 내각장관 스즈키 칸타로는 쇼와 천황의 숙부인 히가쇼미야 히가시카타 황족의 미누히코 왕자와 내각을 구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히사미야 요시코 황후. 히가시야 궁 내각은 일본 역사상 유일한 왕실 내각입니다. 황제의 가장 큰 임무는 변화하는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히가시카타 궁 내각에는 국무 대신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 외무 대신에 시게미쓰 아오이가 있었습니다. 그 후, 시게미쓰 아오이가 어떤 이유로 사임하고, 전 봉천 총영사의 사위이자 베테랑 마키노 노부켄인 요시다 시게루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때 연합군은 천황 더글러스 맥아더를 파견했고, 연합군 총사령부는 황실에 불리한 발언을 금지한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의 해임을 요청했고, 히가시야 궁 내각은 사임했다. 수명이 54일로 일본 역사상 최단 내각이 되었습니다.
히가시야 궁 내각이 붕괴된 후 쇼와 천황은 쇼와 20년(1945년) 10월 9일 친미·영세파인 시타하라 기주로를 임명해 내각을 구성했다. 시타하라 내각이 설치되었다. 우모하라에게 친숙한 것은 1920년대 우모하라 외교다.
전쟁 후 일본 자유당(하토야마 이치로 회장), 일본 사회당(가타야마 테츠 간사), 일본 진보당(마치다 다다야하루 회장) 등 다수의 정당이 생겨났다. , 일본협동당(위원 나가야마 모토 사네히코), 일본 공산당(도쿠다 기이치 사무총장)도 활동을 재개했다. 이듬해 1월 연합군사령부는 전범의 공직을 금지하는 공개석방명령을 내렸다.
전쟁 후 첫 총선이 쇼와 21년(1946년) 4월 10일에 치러졌다. 자유당은 141석, 진보당은 94석, 사회당은 93석, 자유당은 93석을 얻었다. 협력당이 승리한 14석 중 공산당이 5석, 기타파가 38석, 무당이 81석을 차지했다. 자유당이 제1당이 되었고, 하토야마 이치로가 내각 구성을 준비하던 중 본부로부터 소환 명령도 내려 내각 구성권을 상실하게 되자 임시로 자유당을 넘겨주고, 요시다 시게루 외무상이 총리직을 맡는다.
그 결과 요시다 시게루는 구헌법 하에서 천황령에 의해 임명된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그는 시게하라 전 총리를 내각에 초청해 진보당과 공동 내각을 구성했다. 전후 연합군 점령하에서는 일본헌법에 따라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고, 헌법에도 국가주권과 평화주의를 명시하였다. 일본 헌법에 따른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요시다당이 승리해 사회당과 사회당의 가타야마 테츠가 이끄는 연정내각을 구성했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의 아시다가 총리가 되었는데, 당시 사회당 내에서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심각한 반대가 있었고, 이 '중도정권'이 발발했다. 쓰러뜨리다. 요시다 시게루는 다시 집권해 4차례 연속 정부를 구성했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연정이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귀국한 후 요시다 시게루와 맞서게 되었고, 결국 대내외적 어려움으로 인해 하토야마 이치로는 야당과 타협하여 정부를 구성한다는 조건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취임 후 즉시 국회를 해산하고, 선거 후 다시 정부를 구성했고, 당시 분열되었던 좌파와 우파가 합쳐져 다시 일본사회당을 창당했다. 하토야마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민주당과 자유당을 통합하여 당시 보수 계약으로 알려진 자민당을 창설했습니다. 1955년 선거에서 자민당이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일본 사회당이 제1야당이 됐다. 이런 정치생태는 1993년까지 지속돼 '5년제'로 불렸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일본과 소련의 수교를 추진하다 사임하고 이시바시 잔샨(Ishibashi Zhanshan)이 그 뒤를 이었다. 뜻밖에도 이시바시가 내각을 구성한 직후 그는 심각한 건강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전범으로 기소된 외무대신으로 교체됐다. 기시 노부스케의 목적은 실제로 이를 위해 미일 안보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혁신과 보수의 두 주요 세력이 최종 대결에서 대결하여 현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사회 운동인 '안보 투쟁'으로 분출되었습니다. 그 후 일미 안보조약 개정이 자연스럽게 발효되자 기시 노부스케는 사임하고 요시다 시게루의 총애하는 제자인 통산상 이케다 유우토가 그 뒤를 이었다.
이케다는 현장에 나온 뒤 기시 노부스케가 남긴 사회적 대결에 맞서 '관용과 관용'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으며(특히 소득 배증 계획이 실현된 1960년대 이케다 내각 시기) 경제 강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케다는 3차례 연속 내각을 구성했고,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소속의 사토 에이사쿠와 경쟁까지 벌였지만 결국 후두암으로 사임했다. 사토 에이사쿠가 그 뒤를 이었다. 사토는 내각을 구성한 후 오키나와현을 일본에 반환하고 이케다 씨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 경제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사토 에이사쿠는 4연속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고, 3연속 내각을 구성했다. 그의 임기도 그의 멘토인 요시다 시게루와 메이지 시대의 가쓰라 다로의 임기보다 많았다. 그가 퇴임을 선언한 후 자민당에서는 사토파의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파의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파의 후쿠다 다케오, 미키파의 미키 다케오 등 5명이 출마했다. 대선에서. 결국 다나카와 후쿠다만이 참전했는데, 이를 가쿠후쿠 전쟁이라고 한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오히라, 미키, 나카소네(야스히로)를 끌어들이고 후쿠다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와 일본 열도의 변혁 계획이다. 동시에 다나카는 돈 권력 정치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자민당은 잇따른 폐단에 연루됐다. 쇼와 49년(1974년) 10월, 문예춘추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금전관계와 인맥에 관한 연구』를 출판하여 당과 의회 내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다나카는 같은 해 11월 사임을 발표했다.
자민당 시이나 에쓰자부로 부총재는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소환했다. 미키 다케오(Miki Takeo)가 후임 사장으로 임명되어 세계에서 시이나(Shiina)로 알려졌습니다. 미키 타케오가 정부를 구성한 뒤 미국 화이트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로하히드 사건이 드러났다. 다나카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됐다. 다케오 미키는 이 문제를 이용해 다나카 카쿠에이를 공격하려 했다. 그 결과 당내 주요 파벌이 당위원회를 구성하고 후쿠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선출했다. 그 결과 자민당은 중의원 선거에서 패해 미키가 사임하고 후쿠다 다케오가 그 뒤를 이었다.
후쿠다 타케오는 원래 마사오시 다헤이와 은밀한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후쿠다는 당 업무를 다헤이에게 넘겨주고 한 임기만 하고 다헤이에게 맡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당 대표 재선 출마 약속을 어기고 오히라가 당선에 출마했다. 그 결과, 그는 예비선거에서 후쿠다를 압도적으로 꺾었고, 후쿠다는 레이스 탈퇴를 선언했다. Daping은 캐비닛을 구성했습니다.
자민당은 잇따른 스캔들로 이듬해 중의원 선거에서 패했다. 후쿠다파, 미키파, 나카소네파는 오히라의 사임을 요구했지만, 오히라는 다나카파의 지지를 받아 이를 거부하여 40일 항쟁을 촉발시켰다. 쇼와 54년(1979년) 11월,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자민당 대표와 당원들이 동시에 선거에 참가한 결과, 오히라가 결정적인 표를 얻었다. 다나카파와 소수정당 신자유클럽의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후쿠다 다케오를 물리치고 정부를 구성했다.
쇼와 55년(1980년) 일본 사회당, 공명당, 민주사회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안했고, 비주류 세력이 연합을 결성해 당풍을 쇄신했다. . 규율 바로잡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지도부의 답변은 불완전했다. 그 결과 비주류의 지지와 부재로 불신임안이 243대 187로 통과됐다. 국회를 해산시키게 되었고, 선거 도중 타이헤이가 갑자기 사망하고, 자민당이 승리한다. 결국 스즈키 젠유키가 내각 구성의 과도기적 역할을 맡았다.
2년 후, 스즈키 젠유키는 재선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당 대표로 선출되어 자민당을 또 한 번 정점으로 이끌었다. 1987년에 사임하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信)가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내각을 구성하였다. 쇼와 천황이 쇼와 64년(1989년) 1월 7일에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사망한 다음 날(1월 8일)부터 연호가 헤이세이 시대로 바뀌어, 이를 헤이세이 시대(1989년~현재)라고 합니다. ).
릭 루테 스캔들로 자민당이 타격을 입었고,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사임해야만 했다. 그 뒤를 이어 우노 소스케 외무상이 임명됐다. 그러나 취임 후 우노 소스케와 게키의 불륜이 폭로되고, 릭 루트 스캔들과 자민당 정부의 소비세 시행에 대한 대중의 불만으로 인해 이 세 가지 큰 문제가 그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해 7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다. 자민당의 당선 의석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그 결과 우노 내각은 무너졌다. 카이후 토시키가 성공했습니다.
1991년 말 가이후 도시키가 재선을 포기하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이듬해 말 자민당 다케시타 당 대표인 가네마루 노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다케시타 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오부치 당파와 하네다 당파로 갈라졌다. .
1996년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사임하고 하시모토 류타로 자민당 새 총재가 뒤를 이었다. 사회당은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내각 밖에서도 협력했다. 2년 후 참의원 선거 참패로 하시모토 내각이 무너지고 오부치 케이조(Obuchi Keizo)가 그 뒤를 이었다. 오부치 케이조는 이전에 같은 파벌(오자와는 이때 이미 자유당을 창설한 상태였다)이었던 오자와 이치로를 끌어들여 신공명당에 협력했다.
2000년 자유당은 여당 연합에서 이탈한 반면, 보수당에서는 분리되어 여당 연합에 남아 있었다. 오부치 케이조(Obuchi Keizo)는 뇌졸중으로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당 최고 지도자들의 동의에 따라 모리 요시로(Mori Yoshiro) 사무총장이 후임이 됐다. 모리 요시로는 재임 기간 동안 이미지가 낮았으며 종종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하시모토 류타로가 자민당 총재 경합을 벌여 결과 고이즈미가 승리하고 5년여 넘게 고이즈미 시대가 시작됐다.
2003년에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이 민주당과 합병해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고, 통합된 민주당이 선거에서 큰 이득을 얻었다. 이듬해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자민당을 제치고 첫 정당이 됐다. 이는 고이즈미의 개혁이 도전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05년 고이즈미의 우편개혁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되지 않자 중의원은 해산됐다. 모든 반대파를 개혁 반대자로 규정하는 데 성공한 후 자민당과 공명당은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획득하여 국회의 장악력을 확고히 장악했습니다. 중의원의 3분의 1 이상이면 국회의 의결이 된다).
2006년 고이즈미는 재선에 실패했고,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새 총리로 선출됐다. 아베 총리는 고이즈미의 반중 정책에 반대했지만, 자민당은 여러 농림수산부 장관의 비리 사건으로 인해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전례 없는 패배를 당했다. 당선자 수는 1989년 참의원 선거와 같았다. ,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이 상원을 장악했습니다. 내각과 당 지도부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너무 복잡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쿠다 다케오 전 관방장관의 아들인 후쿠다 야스오는 만장일치로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다. 그러나 집권 1년 만에 만장일치로 집권했다. 내각은 여전히 지지율을 높이는데 실패했다. 차기 중의원 선거가 1년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은 붕괴를 선언했고, 당 대표에 4차례 출마해 간사장을 역임한 아소 다로(麻藤多郎). 아베와 후쿠다 시대에 국민들 사이의 인기와 당내 지지로 인해 정부 구성에 선출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일본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아베 신조(2006~2007), 후쿠다 야스오(2007~2008), 아소 다로(2008) 등 6명이 7차례 총리를 역임했다. ) -2009) 하토야마 유키오(2009-2010) 칸 나오토(2010-2011) 노다 요시히코(2011-2012.12) 아베 신조(2012.12-현재).
헤이세이 시대에는 경제 거품이 터지면서 불황에 빠졌다. 장기불황 속에서 실업률은 높아지고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렸다. 이 기간 동안 중국, 한국 등 주변국의 경제는 급속히 성장한 반면, 일본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이후 공식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혜택을 받지 못한 저소득층 사이에서는 불만이 있었다. 쇼와 초기에 등장한 민족주의가 다시 활성화된 것처럼 이러한 불만이 해외로 전이됐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