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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재판은 몇 번이나 열리나요?
분류: 사회와 민생법
분석:
정답은 818번입니다.
1946년 5월 3일,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이 재판은 도쿄에서 열렸기 때문에 '도쿄재판'이라고도 불렸습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 미국, 영국 외무장관이 회의를 열고 일본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일본의 항복과 일본의 점령 및 통제'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일본 전범 처벌 포함)가 실현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9개국이 여러 차례 외교협상을 벌인 끝에 9개국이 합의해 일본의 주요 전범들을 국제사회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9개국 대표로 구성된 군사법정. 인도와 필리핀도 합류한 뒤 국제군사재판은 이들 11개국의 대표들로 구성됐다.
1946년 1월 19일, 극동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국제군사재판'과 기본적으로 내용이 동일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선포했다. 유럽의 경우 ***". 이 법에 따르면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위 11개국의 판사 1명과 국가별 검사 1명으로 구성돼 검찰위원회를 구성한다. 호주 대표 웹 경(Sir Webb)이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됐고, 미국 변호사 지난(Jinan)이 검찰총장을 맡았다. 같은 해 4월 25일 법원은 극동국제군사재판규칙을 공포했다. "법원 ***"의 규정에 따라 모든 피고인은 변호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각 피고에게는 미 육군성에서 미국인 자원봉사 변호사가 배정되었습니다. 또한 각 피고인은 사건 변호를 돕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도 고용했습니다. 모든 증인과 물적 증거가 확보된 후, 1946년 4월 29일 검찰위원회는 28명의 전범을 기소할 것을 법원에 공식적으로 제안했습니다. 기소장에는 그에게 평화 파괴, 살인,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의 범죄 혐의로 기소된 55개의 혐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판은 1946년 5월 3일 시작돼 1948년 11월 12일 2년 반 동안 이어졌다. 이번 재판은 818회에 걸쳐 법정에 출석한 증인이 419명, 서면 증인이 779명에 이르렀고, 4,300개 이상의 증거가 채택되었으며, 판결 내용은 1,213페이지에 달했습니다. 판결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아시아, 태평양에 대한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한 범죄를 폭로했으며 피고인 2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 중 도조 히데키, 도이하라 겐지, 히로타 히로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기무라 고타로, 마츠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등 7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아라키 마사오, 오이소 쿠니아키 등 16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각각 징역 20년과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은폐로 인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에서 유혈범죄를 저지른 일부 일본의 주요 전범들은 여전히 일본정부와 독점자본의 책임을 면할 수 있었고, 황제의 책임은 전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판결은 독일 나치를 제재한 뉘른베르크 재판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에 객관적으로 타격을 입힌 판결이었다.
A급 전범은 주요 전범이다. *** 법원의 규정에 따르면 범죄는 (A) 반평화범죄, (B) 전쟁범죄, (C) 반인도적 범죄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됩니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됩니다. : 평화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가급 전범,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나급, 다급 전범이다. 도쿄재판의 대상은 주로 A급 전범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은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인 역사를 최대한 길게 설명하며, 다양한 규약을 확립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범죄는 국제법상 높은 수준이다.
▲목형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로 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1948년 12월 23일 이케부쿠로 사가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도조 히데키 육군 대장, 전 일본 관동 원정군 사령관, 전 육군 장관, 전 총리.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장, 일본 육군 장관, 전 관동군 참모총장, 전 중국 파견군 참모총장.
기무라 효타로 육군 대장, 전 버마 일본군 총사령관.
도이하라 켄지 육군 대장, 특수요원, 일본군 참모본부 장교.
히로타 고키 남작, 전 일본 총리.
마츠이 이와네 육군 장군, 전 일본 중부 원정군 총사령관.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 전 일본 제14사단 참모총장, 전 육군성 군무국장.
▲무기징역
16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3명(오이소 구니아키, 시라토리 도시오, 우메즈 요시지로)이 감옥에서 사망했고 나머지는 1955년 가석방됐다.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 전 문부과학대신.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 전 일본군 참모총장, 전 관동군 사령관.
오시마 히로시 전 독일 대사.
오카 케이준 해군 제독, 전 일본 해군성 군무국장, 해군 차관.
가야 노부히로 전 일본 티베트 장관.
키도 고이치 후작, 전 내무대신 겸 전 문부대신.
구니아키 고이소 육군 대장, 전 한국 총독, 전 일본 총리.
사토 켄료 육군 대장, 전 일본 육군성 군무국장.
시마다 시타로 해군 제독, 전 일본 해군 장관, 전 해군 사령부 사령관.
시라토리 도시오 전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이자 외무성 고문.
스즈키 테이이치 육군 대장, 전 내각 기획청장, 대장관.
난지로 육군 대장, 전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 한국 총독.
하시모토 킨고로, 육군 장군, 중일 전쟁 선동자, 일본 이잔 정치 협의회(파시스트 통치 하의 의회) 의장.
하타 순로쿠 육군 대장, 전 일본 중부 원정군 총사령관.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일본 국무장관 남작.
호시노 나오키(호시노 나오키) 전 일본 국무장관 겸 등록관.
▲징역
아오이 시게미쓰(7년) 전 일본 외무상이 가석방 뒤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복무했다.
시게토리 도고(20년) 전 일본 외무장관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선고 전 질병으로 사망
나가노 오사무, 해군 원수, 전 일본 해군 사령부 사령관 (1947년 1월 5일 사망).
마츠오카 요요(Matsuoka Yoyo) 전 일본 외무장관(1946년 6월 27일 사망).
▲기소 면책
9·18 사건 기획에 참여한 일본의 파시스트 학자 오카와 슈아키가 재판을 받은 뒤 정신병을 앓아 재판이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