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회사 연구 - 한국군 '684' 폭동이 정말 사실인가요?
한국군 '684' 폭동이 정말 사실인가요?
이건 실제 사건입니다! --------1960년대 후반, 남북한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양측은 미친 듯이 간첩과 암살 작전을 벌였습니다. 1968년, 남북한의 긴장된 대결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북한은 31명으로 구성된 육군 암살단을 편성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남한으로 파견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늦은 밤, 31명의 자살폭탄 테러범들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중무장된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5일간의 고된 산행 끝에 대한민국의 대통령궁인 청와대에 도착했습니다. 암살단이 공격을 하려던 순간, 청와대 헌병대의 신고를 받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자리에서 암살단 5명이 사살됐고, 그 중 2명이 체포됐다. 나중에 탈출한 이들은 운 좋게 한 명만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국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아 차례로 숨졌다. 이 총격 사건으로 한국의 현지 경찰서장도 사망했다. 청와대 피격 사건은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고, 북한에 대한 보복 요구도 계속해서 커졌다. 청와대 피격 다음날 북한은 원산 앞바다에서 미 전자정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한반도 정세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상황이었다. 한국은 마침내 북한 암살단과 같은 규모인 31명으로 구성된 대북 공격 전담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이 부대의 계획은 북한 특수부대의 거점을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신중한 검토 끝에 최종 임무는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중앙정보부는 구체적이고 철저한 암살계획을 수립했고, 공군은 특수부대 모집과 훈련, 암살임무 수행 등을 담당했다. 이것이 '오소리 작전'이라는 코드명으로 알려진 김일성 암살 계획이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암살단은 열기구를 타고 평양 김일성 궁 상공으로 날아간 후 지상으로 낙하산을 타고 암살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김일성 궁궐의 구조와 주변 지형은 이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공군 SR-71 고고도 정찰기로 촬영돼 남조선 중앙정보부에 넘겨진 상태였다. 작전은 극도로 비밀이 보장됐고, 공군은 거의 인적이 끊긴 실웨이섬을 훈련 장소로 선택했다. 섬에 있는 유일한 가족을 퇴거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고, 김순웅 대위가 이끄는 공군특수부대를 보내 섬에 다양한 캠프 훈련 시설을 건설했다. 1968년 4월 말, 31명의 암살단이 실웨이 섬에 도착했다. 암살단의 대부분은 뺑소니 트럭 운전사, 서울역 암술꾼, 가짜 승려, 거리 가수, 사기꾼, 술고래, 서커스 지도자, 복싱 선수, 터널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 등이다. - 그런 인물은 흉악한 범죄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찰이 처리하기에는 여전히 매우 어렵습니다. 이밖에 다른 팀원 5명도 납치된 평범한 한국인이었다. 이처럼 전과가 있는 자살대원들을 '훈련병'이라 하고, 나머지 30명의 공군 특수부대 장교와 교육, 훈련, 섬방위를 담당하는 군인들을 '핵심병사'라고 부른다. 이 특수부대는 '684북방군'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명목상으로는 2325공군부대 209분대에 속해 있으며, 대장은 김순웅이다. 처음에는 훈련병과 기초병사 사이에 깊은 갈등과 오해가 있었지만, 이후 3년간의 체육, 군사훈련을 통해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공유하고 마침내 갈등을 만회했다. , 그리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실미도에서 약 7개월간 악마훈련을 받은 뒤 비밀리에 군함을 타고 북한과 매우 가까운 백령도로 이동해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인 1969년 3월경 작전중단 명령을 받았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완화세를 보이고 있었고, 남북은 분단 이후 첫 남북적십자회담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내 7월 '남북평화협정'이 체결됐다. 1972. 이런 상황에서 남조선 정부는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일성 암살 계획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암살단은 암살을 중지하라는 명령에 극도로 분노하고 불만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웨이 섬으로 돌아가 훈련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웨이섬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의 공급은 기본적으로 중단되었고, 매일매일 음식의 질은 점점 나빠졌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파스타만 먹었다. 겨울철 난방에 사용되는 연료도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실웨이섬은 점차 잊혀지고 황량한 섬이 되어갔다.
비인도적인 처우를 견디지 못한 두 암살단은 인근 섬으로 도망쳤지만 나중에 민간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양 상태와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됐지만 훈련은 여전히 빡빡했기 때문에 훈련 중 팀원 5명이 사망했다. 남은 24명의 팀원들은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언젠가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다시 활용되어 삶을 죽음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이 난처한 상황을 없애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수의 간부들만이 이 부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CIA와 공군 고위 관계자들은 1971년까지 부대의 생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공군 참모총장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부대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이 암살단이 비밀을 유지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마침내 남한 당국은 안전을 위해 “모든 흔적을 파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비록 이 지시에는 "모든 팀원을 죽여라"라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자살대원들은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휴가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오락도 없고, 위로해 줄 여자도 없이 당한 비인도적인 대우와 잔혹한 고문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남은 것은 익명성, 알 수 없는 고통, 지옥 같은 밤낮뿐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제 국가가 더 이상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그들은 국가 정책과 이익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필연적으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오전 5시 20분, 훈련병들이 훈련소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중 갑자기 전날 밤 술을 많이 마신 뒤 자고 있던 기초병사들의 기숙사를 습격했다. 훈련병은 진춘웅 대위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고, 진춘웅 대위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훈련병들은 즉시 통신실을 파괴했다. 기초병사들과의 이번 전투에서 훈련병 1명이 사망하고, 기초병사 1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18명이 일시적으로 폐업한 사람도 있고, 거름 구덩이와 바위굴에 숨어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황량한 아침의 정적 속에서 훈련병들은 실웨이 섬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후 남은 훈련병 23명은 인근 무의도 어부 어선에 올라 곧바로 인천부두로 향했다. 이들은 인천에 상륙한 뒤 버스 여러 대를 잇달아 납치해 서울의 관문인 영등포지구까지 버스를 갈아탔다. 일반 시민과 경찰 12명을 차례차례 살해한 뒤 지슈로로 돌진해 중앙정부와 직접 협상하기 위해 서울행 행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군의 방해로 인해 양측 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 오후 2시 40분쯤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필사적으로 폭탄을 터뜨렸다. 현장 버스에서는 훈련병 15명과 승객 3명의 시신이 발견됐으며, 나머지 4명은 탈출해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반란에 대응하여 한국 정부는 처음에 이 반란을 북한 게릴라 조직의 소행으로 묘사하려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장세력 집단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반발을 두려워한 것인지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입장을 바꿔 “공군특수부대의 반란이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을 암살한 비밀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외부에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은 비난을 받아들이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