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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항일전쟁 승전절의 유래 항일전쟁 승전절이 9월 3일인 이유

서문: 매년 9월 3일은 우리나라에서 항일전쟁 승전 7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9월 3일은 항일전쟁 승전기념일? 왜 9월 3일이 승전기념일인가요? 저와 함께 알아보세요.

9월 3일 항일전쟁 승전절의 유래

1937년 7월 7일 일본 침략군은 '7대 학살'을 일으켰다.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마르코 폴로 다리 근처 7.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마르코폴로 대교 사건은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한 전면 침략 전쟁의 시작이자 중국 전국적인 저항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전쟁은 8년 동안 지속됐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중국, 소련, 미국, 영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종전칙령'을 방송하는 형태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1945년 8월 21일, 후난(湖南)과 구이저우(貴州)의 교차점인 지강(臺江)시에 일본 항복대표이자 중국 주둔 일본군 참모부사령관 이마이 다케오(伊井竹雄)가 항복 협상을 위해 찾아왔다. 허잉친 중국군 총사령관과 미군 관련 인사들이 회담하고 있다. 9월 2일, 일본 대표는 도쿄만에서 USS 미주리 전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전국에 다음 날 3일을 기념하도록 명령했고, 1946년부터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전절로 지정했다.

1949년 말, 중화인민공화국과 국무원은 8월 15일을 항일전쟁 승리절로 지정했다. 1951년 8월 13일 정무협의회에서는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전절로 정하는 고시를 공포하고 매년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전절'로 재설정하였다.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명령 제270호 '국경일 및 기념일 공휴일'(1949년 12월 23일 국무원에서 공포하고 9월 18일 국무원에서 개정) , 1999)에 발표된 항일전쟁 관련 기념일에는 "7.7일 항일전쟁기념일, 9.3일 항일전쟁승리절, 9.18 항일전쟁기념일"이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규정의 형태로 제정한 항일전쟁 기념일이다.

왜 승전기념일이 9월 3일인가요?

8월 15일 -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중국, 미국, 영국은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 즉 "포츠담 선언" 또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나중에 소련이 선언에 합류했습니다). 8월 15일 12시,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중국, 미국, 영국, 소련 4개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충칭 시간) 수도에서 협의를 통해 합의했다. 충칭,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 4개국에서는 중국어로 연설하고, 영어와 러시아어로 같은 내용의 방송이 전장 양쪽의 적군 육해공군에 방송되었고, 세계 모든 나라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945년 《신화일보》 게재:

1945년 8월 14일 오후 7시(충칭 시간 8월 15일 오전 7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일본 정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인 포스탄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항복 문서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해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영국, 소련, 중국 수도에서는 고위 장성들을 파견해 참가할 예정이며, 동시에 연합국 군대는 항복 문서가 공식적으로 서명되면 일본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즉, 일본은 8월 15일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지만 모든 법적 절차를 완료하지 않고 항복식도 진행하지 않아 이날은 임시 종전을 선언했을 뿐이다.

9월 2일 -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각계에서는 일본이 법적 차원에서 항복식을 완료할 것을 촉구했다. 엄청난 압력 속에서 일본 정부는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연합군을 대신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사람은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였으며, 중국 대표는 당시 군 사령부 장관이었던 서영창(徐永昌)이었다. 민족주의 정부.

이번 일본의 항복 장소는 일본 영토가 아닌 일본 도쿄만 영해 인근으로, 9월 2일 오전 9시 2분부터 시작될 미주리함 미주리함에서 항복식이 거행됐다. 항복식에 참석한 일본 정부 대표는 시게미쓰 아오이 외무상, 일본군 대표는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항복식에서 6개의 펜을 사용했다고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펜은 전우들에게, 나머지 4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부부에게 전달됐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문서로, 그 중 하나가 현재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45년 9월 3일 "신화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일본의 항복 문서는 9월 2일 오전 10시 30분 USS 미주리호에서 서명되었습니다. 항복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정부와 제국 본부의 명령으로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수락합니다. 2. 우리는 일본제국 본부에 있는 모든 군대와 일본이 통제하는 모든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연합군에게 선언합니다. 3. 우리는 모든 일본군과 국민에게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모든 선박, 항공기, 군사 및 민간 재산을 보존하고 손실을 방지하며 연합국 최고 사령관 또는 다음과 같은 요청에 응할 것을 명령합니다. 모든 요청은 연합국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 기관에 제출됩니다. 4. 우리는 일본군 기지에 모든 일본군 사령관과 일본 지배하에 있는 모든 군대의 사령관이 어디에 있든 즉시 무조건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관할하에 있는 모든 군대에 항복할 것을 명령한다. 5. 우리는 모든 공무원과 육군, 해군, 육군의 모든 장교에게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 항복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선언, 명령 및 지시를 준수하고 수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장교들에게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또는 그 명령에 따라 특별히 직무에서 해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위를 유지하고 비전투 임무를 계속할 것을 지시합니다. 6. 우리는 일본 정부와 그 계승자인 야타다(Yatada)가 포츠담 규정을 이행하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이나 기타 지정된 연합군 대표가 포츠담 선언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명령을 내릴 책임이 있습니다. 조치를 취하려면 위 항목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7. 우리는 일본 제국 정부와 제국 본부에 현재 일본이 통제하고 있는 모든 연합군 전쟁 포로와 연합군 수용자를 즉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보호, 돌봄, 보급품을 제공하고 즉시 지정된 장소로 이송할 것을 명령합니다. 8. 국가를 통치하는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에게 있으며, 최고 사령관은 본 항복 조건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9월 3일 공식적으로 발효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항복은 법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확인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완전한 종식과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9월 3일,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가 환호했다. 국민당 정부는 국경일을 선포하고 온 국민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깃발을 날렸다.

9월 3일 '신화일보'는 마오쩌둥 동지가 쓴 특문을 게재했다. "항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중화민족의 해방 만세!"

그 뒤 중국에서 벌어진 학살, 항복식도 속속 시작됐다. 1945년 9월 9일 오전 9시, 중국 전역에서 열린 일본 침략자들의 항복 조인식은 난징 구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일본 침략자들을 대표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고바야시 아사부로는 허잉친에게 항복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중국침략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영원한 장면을 남겼다.

9월 3일 – 항일전쟁 승전일

항일전쟁 승리 이후 1946년 국민정부는 9월 3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1946년 기록 보관소:

민국 35년(1946) 2월, 안후이성 정부는 9월 3일을 규정하는 '이전 명령'을 내렸다. 중화민국 34년이 전쟁종식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국민당 정부의 명령에 따르면 중화민국 34년(1945년) 9월 3일은 전쟁이 끝난 날이다. 도쿄에서 항복한 동맹국은 전쟁 종료일로 하여 명령을 이양하고 부하들에게 통보한다."

1946년 7월 5일 우후현 집행위원회 안후이성 국민당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보낸 전보에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상 9월 3일은 적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동시에 열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신중국이 건국된 후인 1951년 8월 13일 중앙인민정부 정무위원회는 '9월 3일을 반(反)전승일로 지정하는 통지문'을 발표했다. -일본전쟁."

'고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49년 12월 23일 발표된 통일공휴일 및 기념일 공휴일 규정에서 8월 15일을 항일전쟁기념일로 지정했다. 승리의 날. 일본 정부는 1945년 9월 2일 항복 조약을 체결한 후 항복했다. 그러므로 항일전쟁 승전기념일을 9월 3일로 바꿔야 한다.

2014년 2월 27일,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9월 3일을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절로 지정하기로 의결됐다. 이번 결정은 중국인민의 뜻을 반영한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절을 제정한 첫 번째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