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재경 문답 - 대한민국 대구에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의 진행 상황

대한민국 대구에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의 진행 상황

2002년 9월 27일

고인 가족 10여명이 목격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대구지검은 이날 '개구리' 4마리를 발굴했다. 남은 시신은 소년의 시신이 발견된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원원산 자락에서 발굴됐으며, 시신 한 구와 흰색 운동화, 기타 옷가지 등이 발견됐다. 이날 발굴작업을 통해 10대 5명의 유해와 신발 5켤레의 유해가 모두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실종된 '개구리소년'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다.

유골이 발굴된 현장에서는 총구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2cm 크기의 철편을 포함해 총알 3발이 발견됐다. 경찰은 “철편의 크기가 현재 우리 군이 사용하는 어떤 총의 총알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밝혔다. 네이티브 디비전.

또한, 고인의 가족들은 10대가 길을 잃고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경찰의 추측을 믿을 수 없어 강력히 항의했다. 김영규(당시 11세) 어머니 최경희(44) 씨는 “오늘 발굴된 운동복의 수갑 두 개가 촘촘하게 묶여 있었다”며 “아이가 묶여 묻혀 있던 증거”라고 말했다.

우철위안(13세)의 아버지 유중위(53세)는 “보통 월롱산을 놀이터로 삼는 아이들이 길을 잃고 길을 잃는 것이 어찌 이치적일 수 있겠는가”라고 신이 났다. 낮에 죽나요?” 1991년에는 헬리콥터를 동원했다. 수색을 진행한 경찰은 아직 나뭇잎이 없는 3월이라 위에서도 산들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밤에도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아 살해당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발굴작업에 참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실 박희경(여, 37세) 소장은 아직은 논의할 시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죽음과 개인 매장의 가능성 때문에 그녀는 그 주제를 피했습니다. 경찰은 이날 발굴작업을 마친 뒤 사망자 가족에게서 혈액을 채취해 DNA 감식을 의뢰했다.

또한 '문화일보'는 유해가 발견되기 전날인 25일 4시 30분쯤 익명의 제보 전화를 받았는데, 개구리 소년 5명의 유해가 대구 용산산에 묻혀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날 경찰은 제보자 추적에 나섰다.

2002년 11월 12일

경북대 법의학팀(팀 롱, 곽경식, 경북의대 교수)은 사람이 만든 흔적이 있다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세 명의 '개구리 소년'의 뼈에서 둔기 등의 부상이 발견되어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과학수사팀에 따르면 개구리 소년 3인(유철원, 김종식, 김용식)의 두개골에서는 둔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부상이 발견됐다. 큐). 특히 우철원과 김종식의 두개골에서는 출혈 흔적이 발견돼 머리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종식의 왼팔 끝부분에서도 골절 흔적이 발견됐는데, 이는 외부 공격을 피하면서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의학팀은 위티에위안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총알 구멍 2개는 총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총알 구멍과 상처 주변의 작은 흉터로 판단하면 군용 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이는 자체 제작한 산탄총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이를 통해 두개골에서 발견된 부상은 모두 고인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이에 이번 사건을 수사해 온 대구경찰서는 누가 어떤 동기로 '개구리 소년'을 살해했는지 수사에 나섰다.

2003년 9월 24일

24일은 '개구리소년' 유해가 발견된 지 1년이 되는 날 저녁, 조호연, 김용귀, 박찬인. , 그리고 세상을 떠난 유티에, 원조 '개구리소년'의 아버지가 함께 서울에 왔다. 수감자의 공소시효가 3년밖에 안 됐는데, 수감자는 물론 살인범조차 찾지 못해 대통령을 면담하고 포괄적 재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건.

늦은 밤에도 그들은 여전히 ​​선술집에 모여 소주를 마시며 내면의 우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술에 얼굴이 붉어진 우철원의 아버지 유종유(52) 씨는 “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경찰은 살인이라고만 말했을 뿐”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이들의 장례를 이렇게 치룰 수 있단 말인가? 유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더욱 마음이 아팠을 줄은 몰랐다! 의학팀에서는 아들의 부상이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아들의 부상을 대형 화면에 수십 배로 확대해 저에게 절박한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날은 밥도 못 먹고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머리를 날카롭게 찔러 죽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마침내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1년 3월 26일, 사건 발생 11년 만에 대구 월룡산 자락 성산고등학교 신축현장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나갔다가 실종된 어린이 5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 경찰은 그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지난 11월 경북대 법의학팀이 살인 사건이라며 반대 결과를 발표하자 경찰은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경찰 2만 명을 동원해 대규모 수사에 착수했고, 200여 건의 신고와 첩보를 차례로 확인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지난 4월 수사팀을 10명으로 줄였다.

현재까지 경찰은 두개골에 수십 개의 상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 어린이들이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밀렵꾼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만 말할 수 있다. 목표를 정하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어린이의 뼈와 강도가 비슷한 돼지 두개골을 대상으로 상해 실험까지 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박찬인의 아버지 박군서(47)씨는 “경찰은 늘 '사건의 단서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사건 해결 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제 대통령을 면담하고 경찰에 수사 재개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구리소년>의 아버지 중 김종식의 아버지는 유골이 발견되기 전인 200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서울에 오기 전 종식의 묘를 발견하고 "반드시 범인을 찾아 종식에게 복수를 해줄테니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수사는 끝났다"고 개구리소년 생존자들은 경찰청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1991년 3월 26일 실종 당시 경찰이 수사를 소홀히 했고, 9월 26일 유해 발견 당시 현장을 파괴해 범인을 신고할 수 있는 기회와 증거를 놓쳤다고 판단해 경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

당초 유족들은 유해 발견 1주기인 26일 합동장례를 치룰 예정이었으나, 현재는 아이들의 복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25일 오전 10시, '개구리소년' 아버지들과 전국 실종아동·실종가족 찾기를 위해 모인 시민대표 나주봉 씨가 청와대를 찾았다. 청와대에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 신청서를 제출했다.

2004년 3월 26일

“이 선배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꿈을 실현할 것입니다..그들이 우리에게서 배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교는 몇 번이나 울었나요?”

지난 26일 오전, 13년 동안 실종된 '개구리 소년' 5명의 유해에 대한 송별식이 거행됐다. 경북대학교병원. '개구리소년'의 모교 성서초등학교 어린이회장 임희수(음역, 12세) 씨가 추도문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군중 속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명 '개구리 소년'은 김종식(당시 9세), 김영규(당시 11세), 박찬인(당시 10세), 1991년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실종됐다가 2002년 시신으로 발견된 위. 싱시 초등학교 학생 5명(당시 13세), 조하오옌(당시 12세), 철원(당시 13세). 향을 피우고 꽃을 놓고 반야심경을 독송한 후 법식을 집전한 지싱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천국에 갔으니 이제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 사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

전국 미아 찾기 시민단체 뤄저우펑 회장은 추도문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둘째, 셋째 개구리 소년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별식 내내 가족들은 계속 울었다.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200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김현도(58세, 음역) 씨. 김영규 유족 대표는 “그동안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너무 감사드린다. ”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는 노란색 꽃으로 장식된 영구차 세 대에 실려 모교인 싱시 초등학교로 옮겨졌습니다. 1,800명이 넘는 싱시 초등학교 학생들이 선배들을 추모하기 위해 운동장을 돌아다녔습니다. 이후 영구차는 유골이 발견된 달서구 이곡동 옛 거주지와 용산으로 옮겨져 대구시립 화장터에서 화장된 뒤 가족들이 유골을 성주대교 아래 낙상에 뿌렸다. 달성군 하빈면.

가족들은 “살인자를 잡아서 빚을 피로 갚아야 한다. "그리고 이 십대들과 함께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