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재경 문답 - 뤄위안: 항미전쟁과 대한원조를 평가하는 데 있어 세 가지 주요 오류

뤄위안: 항미전쟁과 대한원조를 평가하는 데 있어 세 가지 주요 오류

그러나 현재 여론계에는 이번 전쟁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대미전쟁과 원조한국에 관한 세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가장 큰 오류는 이 전쟁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북한이 침략자이며,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국을 지원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악을 돕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큰 오류는 이 전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중국이 북한을 위해 그렇게 큰 희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큰 오류: 이 전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손실보다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전쟁의 종식은 전쟁이 일어난 38선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오류를 사실에 근거하여 반박하고,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쟁관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북한은 침략자인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세계정세와 그 사건의 원인을 분리할 수 없으며 소위 옳고 그름을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근본 원인을 무시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에 발사된 첫 번째 총성은 한국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남조선 이승만 세력은 평화통일을 바라는 남북한 주민들의 염원을 무시하고, 정당대표인 조국전선의 평화적 호소를 거부하였다. 남북한 국민의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여 북한의 인민의 힘을 말살하려는 군사적 진격으로 인해 북한은 자위전쟁을 의제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발발의 근본 원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2월, 소련과 미국, 영국의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체결한 '얄타협정'을 통해 한국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관리합니다.

7월과 8월에는 '포츠담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중국, 소련, 미국, 영국이 공동으로 통치하게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결정했다. 여전히 한반도 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없어 소련과 미 해공군 간의 작전분계선만 그어졌다.

위 합의에 따라 소련은 일본 관동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중국 동북부와 북한에 군대를 파견했다. 북한으로 진군하는 선봉군이 38선을 넘어섰다.

이때 미국은 일본 본토와의 전쟁에 바빠 북한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의 '수익률'을 공유하기 위해. 38선을 경계로 하여 소련과 행정권을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정세와 여건으로 인해 소련은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장하여 한국과 일본을 미국의 남북으로 나누기로 합의했습니다. 비록 일본에 대한 소련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38선은 한민족으로서는 치유하기 힘든 민족의 균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적 균열은 다양한 전망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한반도 38선은 수년간 지속된 전쟁을 촉발시켰는가?

이는 주로 미국이 한국의 건국을 먼저 지지했고, 미국과 이승만 일당이 전쟁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미국이 '자유세계'와 '원조'를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식민주의 프로그램인 트루먼 독트린을 제안했다. 특정 국가의 "부흥" "공산주의 침투 방지"라는 사명.

그의 프로그램은 냉전의 시발점이자 한국전쟁의 폐단이었다.

1948년 2월, 미국은 유엔을 조작해 '유엔조선임시위원회'가 북한에서 단독선거를 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의안을 내놨다. 그러다가 별도의 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지난 8월 24일, 한국과 미국이 '한미 임시군사협정'을 체결했다.

1948년 9월 9일, 평양 시민들은 북한의 건국을 축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1948년 8월 2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했다(투표한 남조선 유권자는 전체 유권자의 77.52명을 차지했다).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련군은 12월 말 북한에서 철수했다.

이후 한반도에는 '두 체제의 대결'이 형성됐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있고, 미국과 이승만 그룹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북한은 평화통일이 가망 없는 상황에서 자위와 무력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평화통일노선을 추구하였으며 미국과 이승만그룹의 전쟁정책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1949년 6월 초부터 6월 말까지 '조선통일민주조국전선'이 결성됐다. 남북한 대표단 704명이 참석한 회의에서는 조선로동당이 제시한 평화통일 제안과 평화통일 10대 방안이 채택됐다. 6월 말, 세계 여론의 압력을 받아 미국은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전후 남조선 우익세력과 이승만세력은 조국전선의 요구를 무시하고 조국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적극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평화통일의 방법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미국과 한국이 반대하고 있는 미·소 공동위원회와 유엔총회의 북한 해결 노력은 실패했다. ; 북과 남의 대표들로 구성된 조국전선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보장할 수 없다.

이제 남조선 반동세력은 조국전선의 평화통일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지도자들의 견해가 바뀌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통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조선 정부에 대한 무력공격으로 나라를 통일하자는 생각이 떠올랐다”(주북소련대사 보고). 1949년 9월 15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한의 무력통일을 제안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연설을 하였다.

1949년 9월 3일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소련 대사관에 군사공격 계획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다.

1950년 4월 10일 김일성은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도착해 스탈린과 열흘 넘게 회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승리를 확신하는지, 미국이 개입할 것인지,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거듭 물었다.

김일성으로부터 자신만만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받은 후, 스탈린은 마침내 북한의 무력통일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 고문과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 계획에 대한 마오쩌둥의 의견을 듣기 위해 베이징으로 갈 것을 요청했다.

러시아가 공개한 파일에 따르면 김일성 특사와 마오쩌둥의 회담에 관한 보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1949년 5월 15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평양에서 보낸 전보로, 다른 하나는 평양 A씨가 보낸 것이다.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소련 군사고문 코발레프가 5월 18일 베이징에서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 두 전보는 “미국인은 떠나고 일본인은 오지 않는다면, 이 경우 우리는 북한 동지들에게 남한을 공격하라고 조언하지 않는다”는 중국 정부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중국의 파병 결정에 대한 위의 역사적 고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6·25전쟁은 전쟁이었다. 정치의 지속과 조국의 실현은 통일전쟁, 미국이 지지하는 분리주의 정권, 그리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북통일' 정책이 전쟁의 본질을 단순히 판단할 수는 없다. 북한의 '첫 사격'을 바탕으로 한 전쟁은 서방의 자의적 추종은커녕 북한이 '침략자'라고 비난하는 여론도 있다.

남북전쟁은 진전과 반작용으로만 나눌 수 있다. 침략과 침략이 아닌 혁명과 반혁명.

당시 중국은 우슈취안(吳秀泉)을 대표해 유엔 총회에서 미국 대표들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1860년대 미국에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링컨 대통령은 북부 주들의 군대를 이끌고 남부 주들을 공격했는데, 미국 대표들은 이것이 북부에서 남부로의 침략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이번 공격을 주도하는 가장 큰 공격자라고요? ”

“세계인들은 미국 지배세력에게 북한이 어떻게 북한을 침공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레닌은 “전쟁(반동전쟁이냐 혁명전쟁이냐)의 성격은 누가 공격하는지, ‘적’이 누구의 영토인지가 아니라 어떤 계급이 어떤 종류의 전쟁을 벌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의 전쟁은 전쟁의 연속인가?

둘째, 중국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국을 지원해야 하는가?

그는 "미국의 어떠한 도발도 물리치기 위해 중국과 세계 인민이 단결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침공한 미군은 9월 15일 해병 제1사단, 제7보병사단, 국군 제1사단의 협력을 받아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조선인민군은 양측에서 공격을 받았고, 전세는 9월 28일에 급격하게 반전되었다. 적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38도선을 향해 계속 진군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9월 30일 발표했다.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 기념 회의에서 미국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중국인민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침략전쟁에 저항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웃.

이후 저우언라이는 파니카르 주중 인도대사를 만나 미국 당국에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전쟁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미군이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국민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1일 한국군에게 38도선을 넘어오라고 명령했다. 이어 미군도 38도선을 넘어 미친 듯이 북조선을 침공했다. , 전쟁의 불길을 불태웠다.

남조선군이 38도선을 넘던 날, 김일성은 중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제공을 요청했다. 조선인민의 북한 파병을 돕기 위한 '특별지원'이 이날 오전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의제로 상정됐다. 10월 2일, 마오쩌둥은 고강과 덩화에게 전보를 보내 고강에게 조속히 베이징으로 와서 회담을 갖고 덩화에게 동북국방방위를 맡길 것을 요청했다.

그러다가 10월 초 마오쩌둥이 정치국 회의를 연이어 열어 참전군 파견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아니면 당분간 파병을 지지하자는 의견도 있다.

마오쩌둥은 각 측의 의견을 들은 뒤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말하든 지켜보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거듭 신중한 검토 끝에 중앙 정치국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고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북한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마침내 공식 결정을 내렸습니다.

10월 8일 중국 인민혁명군사위는 위원장의 이름으로 동북방위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즉시 북한에 파견하고 펑더화이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소련은 공군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2~2개월 반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마오쩌둥은 신중히 고려하여 지원군에 당분간 파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중앙 정치국. 10월 13일에 다시 회의를 열어 연구를 진행하였고, 최종적으로 소련이 당분간 공군을 파병하지 않더라도 당분간 손실을 감수하고 군대를 파병하여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과 회담 중이던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피해도 큽니다.

이어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는 10월 19일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원병들이 북한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중국 인민과 2년 9개월 간의 대미전쟁이 시작됐다.

이는 마오쩌둥 주석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매우 신중한 결정을 내렸음을 보여준다.

당시 전쟁에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을 연기하는 동지들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국은 이제 막 건국되었고, 부흥의 과정이 필요했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빌미로 유엔의 기치 아래 군사력 1위를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군사 무기와 장비는 격차가 크며, 또한 해외에서 전투할 때 우리 병사들은 그 장소에 익숙하지 않아 우리 군대가 기지에 의존하고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시 우리 군대는 아직 현대전 실시 경험이 부족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이러한 견해가 “모두 합리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국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서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해도 슬프다. “거시적 전략 구도와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국가 이익의 관점에서 볼 때 마오쩌둥 주석은 북한이 무너지면 한미 양국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군사 동맹은 파멸될 것이며, 우리 땅에서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통로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나라는 북동쪽 국경에서 남동쪽 해안까지 결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 전략적 배치로 볼 때 우리나라 중공업 기지의 절반이 동북부에 위치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미국의 1/144에 불과했으며 그 중 80% 이상이 요녕성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심양은 국가 기계제조 중심지였고, 동북부 산업의 절반이 남쪽에 집중돼 있었는데, 남만발전소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북한이 무너지면 중요한 전략이다. 심지어 중국의 수도 베이징도 미국 폭격기의 반경 내에 있으며, 중국의 전략적 후방과 경제, 정치 중심지가 갑자기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38도선을 두고 반격하지 않으면 여전히 최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심양과 안산이 될 것"이라며 "푸순, 푸순 같은 곳 사람들은 마음 놓고 생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군이 북한을 점령하게 된다면 그 오만함은 더욱 오만해질 것이고, 더욱이 장개석 일당을 지지하여 나에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과 미얀마 등의 국정에 더욱 개입할 것이다.

그때는 우리나라의 안보가 대내외 공격을 받는 소극적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우리는 외면하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다.

이를 위해 중국은 합리적이고 강력하며 신중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유엔 주재 중국 대표단 우슈취안(吳秀泉) 장군은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했다: “스페인 내전 때문에 이탈리아가 프랑스 코르시카를 점령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멕시코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남북전쟁, 영국이 점령할 권리가 있나요?” 미국 플로리다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불합리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한국전쟁 때문에 중국의 영토인 대만을 침공하고 중국의 동북 국경까지 전쟁의 불길을 지필 이유가 없다.

침략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다. 중국의 병력 파견이 필요하다!

마오쩌둥은 1951년 10월 23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국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미군이 우리 나라의 대만을 점령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하여 우리 나라의 동북국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중국 인민이 미국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군대는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국 침략자들이 우리를 공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반침략의 깃발을 높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완전히 필요하고 정의로운 일이며, 전국민은 이러한 필요성과 정의를 이해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전국의 사람들이 진실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왜 지금 일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혼란스러운 척까지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 존 톨랜드는 “중국이 국익을 고려하여 북한에 군대를 파견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련이 멕시코를 침공하면 미국은 5분 안에 결정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군대를 파견했다.” 중국의 군대 파병 결정은 완전히 강제적이었고 정당한 조치였으며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전쟁은 득보다 실이 더 컸는가?

여기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은 동일한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것은 한국 국민 사이의 내전이었고 미국이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항미원조전쟁은 1950년 10월 25일 시작되었다. 미제국주의가 우리나라의 보물섬인 대만을 침공,점령하고 우리를 향한 전쟁의 도화선이 되자 우리 군대는 강제로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우리 군대는 국제주의적 성격의 반침략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전쟁이 무승부였다면, 조선인민군은 38도선에서 출발하여 결국 38도선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용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항미전쟁과 원조전쟁은 달랐다. 우리는 압록강에서 출발해 한때 37도선에 도달했고, 마침내 38도선에서 안정됐다.

위도 1도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약 110.94km에 해당하고, 압록강 하구인 단둥 부근의 위도 40도 07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압록강은 약 230도이다. 38도선에서 340㎞, 37도선에서 340㎞ 떨어진 중국 인민군은 극도로 가혹한 전투 환경 속에서도 300㎞ 이상을 전진해 북한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어떤 관점에서 봐도 중국이 승리했다.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로 우리는 장기적인 평화구축 환경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백인"이라는 꼬리표를 제거하십시오.

저항전쟁과 한국원조는 우리나라가 적어도 70년 동안 전쟁 없는 나라를 보장했습니다.

전쟁이 물질적 부를 직접 창출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 부를 직접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즉, 전쟁은 부정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조선을 돕고, 조국을 수호하려는 운동은 온 나라 인민들의 애국적 열정을 크게 고취시켰다.

책 '현대 중국 금융'에 따르면 재정 수입은 1950년 65억1900만 위안, 1951년 133억1400만 위안, 1952년 183억7200만 위안, 1953년 222억8600만 위안이었다. 거의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기 위한 전쟁에서 우리나라 경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쟁.

항미원조전쟁은 우리 나라의 산업화와 국방현대화의 초석을 마련한 것은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1954년 10월 1일.

1954년 당시 중국군은 소련 장비와 모조품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106개 보병사단과 18개 지상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포병사단, 8개 대공포사단, 3개 전차사단, 23개 항공사단. 당시 소련은 중국에 총 156개 원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중 150개는 실행됐고, 그 중 144개는 군사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중국이 기본적으로 완전한 산업 및 국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는 10년도 채 안 걸리고 수십억 위안이 소요되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과 가장 짧은 시간으로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항미원조전쟁 때 적들은 우리에게 국방과 군대의 현대화를 위한 기초를 다지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항미원조전쟁을 통해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이득은 국가적, 군사적 위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세계 최대의 적, 완전 무장한 미제국주의와 8개국 연합군보다 두 배나 많은 17개국 연합군이다.

1950년 중국의 총 공업 및 농업 생산액은 574억 위안(당시 위안화와 미국 달러의 비율을 2.5:1로 계산해 계산하면 229억 6천만 달러에 불과하다) ), 그해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574억 위안으로 중국의 12배가 넘는다.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60만6000톤, 미국은 8772만톤으로 중국의 144배에 달한다.

1950년 10월 미국은 한국 전장에 전투기 1,200대를 투자한 반면, 중국은 간신히 싸울 수 있는 항공기가 110대 남짓에 불과했고, 미국은 해군 함정 300여 척을 투자했다. 아직 전투력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자했으며, 소련에서 주문한 10개 연대의 전차 400대가 막 도착했습니다. 평균 4명이 차량 1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군은 평균 1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500명당 차량은 1대뿐입니다. 미군 연대의 화력 강도는 중국군보다 높습니다.

당시 중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 1개 군단(3개 사단)은 다양한 종류의 포병 1,500문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중국군 1개 군단은 같은 유형의 포병 36문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은 전쟁 기간 동안 330만톤의 탄약을 예상한 반면, 중국은 25만톤의 탄약을 소비하는 데 그쳤다.

이토록 엄청난 전력 격차 속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은 3년 1개월의 전투 끝에 전사자를 포함해 109만3천여 명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는 역사적 기적을 일으켰다. 39만 명이 넘는 미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미국의 공격적인 오만에 큰 타격을 입혔다. 미국은 전쟁에서 막대한 양의 물자를 소비했는데, 전쟁 비용은 83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소비에 이어 두 번째였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이번 전쟁에서 미제국주의 불패의 신화를 깨뜨렸다.

신중국이 건국되자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중국인민은 일어섰다. 이 사실은 당시 모든 사람이 실제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미국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교훈을 주었다. 그러나 동방의 거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후버 전 미국 대통령은 "신화는 깨졌다. 우리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마크 클라크 제3대 총사령관. '유엔군', 한때 머물렀던 그는 고전적인 문장을 썼다: "1952년 5월 나는 대한민국 공산당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17개국을 대표하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5개월 후 나는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 불행한 반도에서의 전쟁은 나의 40년 군 경력의 종말이기도 했다. 저는 우리 정부의 지시를 이행하면서 처음으로 미군 사령관이 되어 승리하지 못한 채 휴전협정을 맺었다는 부끄럽지 않은 영광을 누렸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9시, 펑더화이(Peng Dehuai), 리커농(Li Kenong) 등 의병 대표들이 행진을 했다. 꾸준하고 자랑스럽게 북한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펑더화이(彭德懷) 원수는 과거 서구 열강이 중국 해안을 따라 몇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2만 명의 8개국 연합군을 보내 중국 수도로 직진했던 역사가 끝났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 군사과학원 부회장이었던 리지준 중장은 “100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적을 멸시하고 용감하게 전진한 것은 의병들이고, 우리 중국 인민들에게 굴욕의 검은 반점. 38선과 상간령에 섰던 의병들이 매 순간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웠기 때문에 중국이 이렇게 설 수 있었다." 창진호 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큰 타격을 받은 해병 1사단 작전사령관 바우저 대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상자에 관계없이 무자비한 공격은 모든 육군에게 중요하며 팀원들의 마음 속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악몽입니다. ​​

나는 이것이 미국 침략에 대항한 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성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이드 코리아!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미원조전쟁의 득실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엄청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엄청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