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넷 공식사이트 - 경제 뉴스 - 동북항저항동맹의 장수들은 누구입니까?

동북항저항동맹의 장수들은 누구입니까?

1. 석중항(1906~1936)은 길림성 용지 출신으로 1926년 동북군에 입대했다. 1931년 9·18사변이 터진 뒤 길림항일구국군 중대장을 역임했다. 그는 길림항일구국군이 해산된 후에도 길림동부에서 항일유격전을 지속하였으며 련대사령관, 여단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같은 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편입됐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2사단 사령관을 역임했고, 같은 해 10월 흑룡강성 닝안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사망했다.

2. 샤윤지에(Xia Yunjie)

샤윤지에(Xia Yunjie, 1903-1936)는 산둥 성 이수이 출신입니다. 1926년 3월, 하운걸은 고향에서 군벌전쟁과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관동으로 피신하다가 흑룡강성 탕원현에 이르렀다. 1931년 9월, 중국 공산당 만주위원회 특별위원 풍중운이 공사를 시찰하기 위해 탕원에 왔다. 풍중운이 그를 소개한 뒤 하운걸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2년 10월 10일 지하당 조직의 지도 아래 중국 노농적군 제30군 탕원항일유격대가 창설됐다. 이 항일무력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샤윤걸은 총포와 탄약, 보급품을 수집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1933년 8월 2일, 중국공산당 당원중앙현위원회 제6차 확대회의가 열렸고, 하운걸이 군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군사사업을 책임졌다.

동북항일연합군 제6군 창설자인 하운걸은 당원항일유격대 정치위원, 동북인민군 제6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혁명군은 당원 기지 지역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송화강 양쪽에서 활동하는 하운결은 일본 침략자들에게 "북방 방어선에서 가장 신뢰하는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3. 왕더타이(1907-1936), 동북항일연합군의 명장이자 양징위 동지의 전우. 동북항일연합군 제2군의 창설자이다. 그는 만주동남지역의 항일무력의 단결과 중국 동북지역의 항일유격전의 지속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국의 회복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생사를 오가며 용맹하게 싸우시며 장백산 땅에서 피를 흘리시니라.

4. 진룽구(陳龍九)

진룽구(1904-1937)는 길림성 닝안현 도쿄진 삼가자촌(현 무단장시 닝안시)에서 태어났다. , 헤이룽장성). 1931년 항일구국군에 입대해 신생 5중대 사령관을 맡았다. 1933년 2월 항일구국유격대 제4군에 입대해 부관으로 복무했다. 같은 해 6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에 그는 소련 동부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36년 가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 사령관과 제1사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7년 3월, 그는 15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라오허 대정자산 뒤 천진 반평령산 기슭에서 일본군과 300여 명의 괴뢰 원정대를 저지했다. 군대.

5. 왕광위(Wang Guangyu)

왕광위(Wang Guangyu, 1911-1938), 이전에는 왕싱(Wang Xing)으로 알려졌습니다. 길림성 덕회 출신의 만주족. 동북항일연합군 제4군 부사령관. 1938년 5월 제4군 주력을 이끌고 서부 원정에 나섰고, 같은 해 가을에 주강 기슭에 들어가 활동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군과 괴뢰군에게 포위당해 큰 좌절을 겪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창현 구오정산에서 괴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참고: 바이두백과사전-동북항일연합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