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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나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무력개입 정책을 채택했다. 6월 2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대북 파병을 선언하는 성명을 내고 미 해군 제7함대에 대만해협 침공을 명령했다. 같은 날, 미국, 영국, 기타 국가들이 통제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미군과 함께 북한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6월 28일 마오쩌둥은 연설에서 “국가와 세계 인민이 단결하여 미제국주의의 어떤 도발도 물리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대표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가 미국의 북한과 대만 침공과 아시아 문제 간섭 범죄를 강력 규탄했다. "전 세계의 모든 평화 정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인류, 특히 동양의 억압받는 국가와 민족이 동양에서 미제국주의의 새로운 공격을 막기 위해 함께 일어서도록 촉구합니다."

1950년 9월 15일,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 7만5000명이 북한 서해안 인천항에 상륙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은 양측의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으면서 전략적 후퇴에 돌입했다. 10월 1일 미군과 괴뢰군은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한 뒤 중국과 북한 국경인 압록강까지 계속해서 침공했다.

8월 27일 이후 미국 항공기는 정찰, 폭격, 기총소사를 위해 반복적으로 중국 영공을 침범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 중앙은 북한 당과 정부의 요구에 따라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며 조국을 수호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북한으로 가서 전쟁에 참가할 것을 명령했다. 10월 19일,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관, 정치위원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은 안동(현 단둥), 장뎬하커우, 지안 등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진입해 참전했다. 의용군은 10월 2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조선인민군과 함께 2차례에 걸쳐 연속 전투를 벌여 5만여 명의 적들을 섬멸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적을 38도선 부근으로 몰아냈다. , 처음에는 한국의 전쟁 상황을 역전시켰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7일까지 의용군은 3차 전투를 벌여 19,000명이 넘는 적을 섬멸했다. 1월 25일부터 4월 21일까지 의용군은 4차 전투를 벌여 78,000명의 적을 섬멸했다.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고, 북한을 침공하는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후임으로 임명됐다.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의용군은 다섯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여 82,000명 이상의 적군을 섬멸했다.

1951년 7월 10일 유엔군과 중국, 북한이 북한 개성에서 첫 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협상 테이블에서 정치적 공갈을 감행했고, 중국과 북한군이 통제하는 38선 이북에 군사분계선을 긋도록 요구했다. 이후 대화와 싸움이 벌어지는 한국의 전장에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은 8월 18일 8개 사단의 전력을 집중해 '하계공세'를 개시했고, 이어 9월 29일 가을공세를 펼쳤다. 동시에 미 공군은 이른바 '교살전'을 감행해 중국과 북한 인민군의 후방 수송선과 후방 수송선에 밤낮으로 대규모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교전을 벌였다. 중국과 북한 인민군의 최전선에 대한 식량과 탄약 공급을 차단하고 중국과 북한 측이 협상 조건을 수락하도록 강요합니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끝에 10월 하순까지 적의 ​​공세를 분쇄해 25만명의 적군을 전멸시켰다.

1952년 초 미국 침략자들은 국제협약을 공개적으로 위반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조선 북부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 흑사병, 콜레라, 장티푸스 및 기타 전염병을 옮기는 수많은 동물과 곤충을 퍼뜨렸다. '세균전'이라 불리는 '중국과 북한군, 민간인의 전투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킨다.

1952년 6월 23일, 미국의 북한 공군이 중국 압록강 수력발전소를 대규모로 폭격했다. 7월 11일, 미 공군은 북한의 평화로운 도시 평양에 폭격을 가하고 기총사격을 가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잔혹 행위를 폭로하고 항의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시위와 비난이 시작되었습니다.

패배를 역전시키고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협상 조건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클라크는 1952년 10월 14일 상간링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미군은 6만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고 3000여대의 항공기와 170여대의 탱크를 파견했으며 18개 포병대대를 배치해 3.7평방킬로미터도 안 되는 상간령 진지를 공격했다.

44일간의 치열한 전투 동안 미군은 상간링에 포탄 200만 발과 폭탄 5,000발을 발사하고 900회 이상의 돌격을 가했다. 그러나 자원병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전투에서 자원군은 27,000명의 적을 섬멸했습니다. 1953년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중국인민지원군은 휴전협상에 협력해 두 차례에 걸쳐 공세작전을 벌여 4만명 이상의 적군을 섬멸했다. 7월 13일, 중국과 북한 인민군은 진성 전투를 개시해 5만여 명의 적군을 전멸시키고 178평방킬로미터의 땅을 수복했다.

더욱 불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중국과 북한 대표들과 ‘한국군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3년 32일간 지속된 한국전쟁이 끝났다. 중국과 북한군은 미군 39만 명을 포함해 100만 명 이상의 적을 섬멸하고, 적 항공기 12,200여 대를 격추 및 손상시켰으며, 적 선박 257척을 격침 및 손상시켰으며, 수많은 적 전투물자를 파괴 및 노획하였다. 이 시점에서 중국인민의 미국침략저항운동과 한국원조운동도 성공적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