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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김영남은 어떤 관계인가?

혈연관계 없이 동지애만 있을 뿐이다

서구에서는 북한의 '2인자'에 주목

국제 정세에서 그는 종종 가장 강력한 목소리이다. 북한을 대표하여

인터내셔널 헤럴드 헤럴드(International Herald Herald)의 특별기자 우린(Wu Lin)이 베이징에 게시한 글 9월 9일 북한은 건국 6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축하행사를 주재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이 다시 한번 국제여론의 초점이 됐다.

경축 당일 열병식에 김정일 북한 최고지도자가 참석하지 않자 A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 서방 언론들은 “김정일의 건강이 위독할 수도 있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러나 북한은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을 즉각 부인했고, 김영남은 극히 드물게 일본 공산당 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정일의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 김영남은 올해부터 북한을 대표해 외교 행사에 자주 참석해 여러 차례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결단력 있는 '2인자'

1928년생 김영남은 서방 언론에서 북한의 '2인자'로 평가받는다. 북한은 1998년 9월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제를 폐지했다. 북한은 새 헌법에 따르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고, 서방 언론에서도 김영남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개정헌법에서는 북한 국방위원회의 위상과 권한이 대폭 강화되면서 서방 언론에서는 김정일이 '실질적인 국가수반'으로 불리고 있다.

북한에서는 늘 김정일이 전반적인 상황을 총괄하고, 김영남은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을 총괄해 왔다. 그러나 김영남의 신상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고, 서방 언론도 김영남의 결혼이나 가족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그의 소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대외부 부부장, 외무부 부부장 등을 역임한 그의 이전 직위를 쌓아놓은 셈이다. 1974년 그는 1983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국제부상으로 임명되었고, 1998년에는 정무협의회 부총리로도 임명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였으며 2003년 9월 재선되었다.

그러나 김영남에게 있어 가장 분명한 점은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노선에 대한 확고한 지지이다. 그는 김일성 시대부터 김일성훈장과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그는 "조선의 사회주의를 굳건히 수호하겠다"고 거듭 밝혔으며, 그의 연설은 미국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미국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북한의 시도는 '어리석은 망상'이다.

품위있는 외교관

김용남은 키도 크고 말투도 우아하고 말투도 품위있는 외교관이다. 외교 협상에서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원칙이고, 동의할 때는 비공개로, 거절할 때는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김영남의 모범이다.

1967년 북한에 폭우가 내려 평양이 국가가 되자 김영남은 북한 정부를 대표해 외교사절단을 만났을 때 작업복을 입고 사절단에게 사과했다. 또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제기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해결하도록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중국대사관은 물을 길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진용난은 이 사실을 알고 물탱크를 보내 대사관에 물을 전달해 문제를 해결했다.

1978년 김영남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들어가 북한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김영남은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이 되면서 외국 방문과 국제회의 참석이라는 중요한 책임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는 수십 개국을 방문하고 북한의 대외교류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으며 특히 북-중 관계 발전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1981년 11월 김영남은 조선로동당 대표단을 이끌고 계림을 방문하여 북중 친선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짙은 안개 속에 산이 아름답다.” 가랑비, 바람 맞으며 강 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계림의 아름다운 풍경과 북중의 깊은 사랑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1988년 김영남이 방문했다.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더욱 조정해야 할 시점에 맞춰 첸 치첸 외교부장은 중국 정부를 대표해 한반도 변화와 국제 정세를 분석했습니다. , 그리고 중국은 북한 측의 이해를 얻기 위해 한국과의 관계 완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1992년 수교했다. 그해 7월 중앙정부의 위촉을 받아 평양순안공항에서 그를 영접한 사람은 김영남이었다.

1999년 6월 김영남은 다시 중국을 방문해 1991년 김일성 주석의 방중 이후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가 중국을 방문했으며, 중국-북 관계에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처지.

올해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북한 대표로 참석한 김영남은 4월 28일 평양에서 성화가 전달되자 첫 번째 성화봉송 주자들에게 직접 성화를 전달했다.

80세의 김용남씨는 '조중 노년층 지도자들이 쌓아온 북중 친선'을 줄곧 실천하고 유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