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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서울을 떠나 북한으로 가고 싶은 탈북자가 있나요? 사람이 많나요?
진실! 남한 탈북자 수는 북한 탈북자 수의 수십 배
작성자: 위에진
2018년 12월 21일
많은 사람들이 무지하고 독립적인 사고가 없다는 무지한 중국 사람들은 북한 체제가 한국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탈북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그럼 소위 탈북자라는 게 정말 많은 걸까요? 탈북자가 그렇게 많나요? 오늘날 우리는 데이터가 말하게 합니다.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하세요. 탈북자는 남한의 '국적'을 포기했거나 실제로 남한을 떠나 남한 밖에서 살기를 선택한 남한 사람들이다. '의인'이나 '베트남인'은 좁은 의미의 탈북자, 즉 남한에서 북한으로 탈북한 사람들을 말한다.
한반도 분단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중국, 일본, 유럽에 망명하거나 영구 이주하거나 장기간 정착했습니다. , 미국, 캐나다, 호주 및 기타 지역이 탈북자가되었습니다.
남한 탈북자의 반대말은 탈북자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북하면 '베트남인', 즉 좁은 의미로는 '탈북자'라고 부를 수 있다.
남측 탈북자가 더 많은가, 아니면 북측 탈북자가 더 많은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한, 북한, 해외 등 모든 당사자의 공개 데이터 또는 정보에 따르면 남한의 탈북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북쪽.
분단 이후 전체 탈북자 수는 수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아무리 보수적인 통계를 내더라도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만 계산해도 적어도 100만 명은 넘는 탈북자가 있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20년 동안 남한 괴뢰정부가 집계한 신규 공개 탈북자 수는 20만명이 넘는데, 여기에는 괴뢰정부가 집계하지 않은 비밀 탈북자, 즉 신고된 국민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으로 탈북했다.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2018년 첫 10개월간 신규 탈북자 수가 3만명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 지난 10년간 연간 증가율 2만명 이상을 넘어섰다. 년.
돌이켜 보면 탈북자 수를 비교해 보자.
해외의 일부 반공화국 세력들의 근거 없는 과장된 추론을 근거로 해도 탈북자는 많아야 20만 명에 불과하다.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기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으로, 당시 중국으로 건너간 많은 북한인들이 나중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물론 아직도 중국에 갇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중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따지면 한국 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대규모 탈북자가 대규모로 등장하기 시작한 1998년부터) 2018년까지 20년 동안 총 인원은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는 3만명이 조금 넘었다.
즉, 지난 20년간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기본적으로 2018년 첫 10개월 동안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와 같다.
한국으로 간 탈북자들을 이야기하면, 최근 몇 년간 새로운 탈북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일부 언론에서는 대략 1000명 정도가 된다고 추산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남한에 거주한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왔다.
탈북자들이 북한과 남한으로 탈북하는 현상은 한편으로는 북한의 경제 회복이 더욱 가속화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탈북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분위기가 있어 많은 탈북자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탈북을 시도한 탈북자 중 상당수는 탈북을 하려던 중 몰래 붙잡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남한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심지어 부당하고 허위이고 잘못된 사례도 많았습니다. 남한의 정보기관은 자국 내에서 탈북자를 엄격하게 감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탈북자가 남한으로의 귀순 징후를 보이면 신속하게 적발되어 단속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남한의 악법은 귀화를 위해 북한 주민을 납치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이미 귀화한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에서는 베트남 행위가 불법임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북베트남과 베트남
한국의 4대 유력 신문(반동적 극우 조선일보, 동아일보, 진보 성향 경향신문), <한겨레신문>을 참고하세요. ") 한국 전쟁 이후 공개 보도 자료. 1999년 현재 북베트남에 관한 뉴스 항목은 약 7,000개가 넘습니다.
1945년 김일성은 일제를 물리치고 북한을 해방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남한과 북베트남에서 탈북했다. 이들 대부분은 북녘의 농지개혁을 염원하는 빈농, 중농, 의식 있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지식인, 애국주의를 갖고 미군정의 폭정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였다.
3년 간의 전쟁 동안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중 여러 지점에서 대규모 탈북이 일어났다. 첫째, 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했고, 둘째, 인민군이 대전을 해방했고, 셋째, 인민군이 대구를 해방했다. 이때 한국과 북베트남 출신의 탈북자 중에는 한국의 '의회 의원', 작가, 예술가, 기타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당시 베트남인의 남녀 성비는 9:1로 대부분 청년과 중년 남성이었다. 동시에 미국이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걱정하는 일부 북부 지주, 부유한 농부, 일부 민간인이 남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전쟁 후 1953년부터 1997년까지 55년 동안 기본적으로 남한 사람들만 북한으로 탈출했고, 남한으로 탈출한 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에서 온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배고픈 어부, 최전선 군인, 비밀리에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진보적인 젊은 학생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베트남을 떠나지 않은 대부분의 남한 탈북자들은 유럽, 일본, 미국 등으로 이주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남한 당국에 비판적이어서 한반도 밖의 많은 탈북자들이 망명했다. .
1997년 북한은 제국주의적 봉쇄와 자연재해를 겪으며 '비참의 행군'을 시작했고, 북베트남은 줄어들고 베트남은 늘어나는 등 경제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재 연간 평균 약 10명의 베트남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미공개 숫자까지 고려하면 현재 북베트남인은 매년 수십 명으로 추산된다.
최근 몇 년간 북한은 베트남인에 대한 정책을 조정하고 검열 메커니즘을 강화해 왔다. 단순히 경제적 빈곤을 이유로 북한에 몰래 들어온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고, 설득돼 돌려보내질 수도 있다. . 이는 남한 사람들의 북한행 의욕을 감소시켰습니다. 1990년대 이전의 인센티브 정책이 지속된다면 매년 더 많은 북베트남인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몇 년간 북한의 정책 조정에는 북한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 필요할 때(예를 들어 해방을 위해 2차 통일전쟁이 발발할 때) 남쪽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남측), 북한은 남측의 사회적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2013년에는 남한 출신의 한 탈북자가 38도선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헤엄치려다 괴뢰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16년 12월에도 괴뢰해경이 가상훈련을 실시해 남한의 탈북자들이 해상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첨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에서 탈북한 유명한 인물이나 사건 :
장타이우(소령, 괴뢰군 제8중대 2대대장 주도) 1949년 다오 장원 출신 장교, 병사 600여 명 월북)
표무원(괴뢰군 제8중대 1대대 대장)
김 규식(대한민국임시정부 부의장,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외교부장관)
최홍희(현대태권도 창시자, 박정희 태권도의 창시자) 교사, 전 서독·말레이시아 대사)
최덕신(황포군관학교 졸업, 한국 괴뢰군 창설자 중 한 명, 국방부 차관 역임) 남인형 외무부이자 한국 천도종교 지도자)
류미영(대한민국 천도종교 지도자 최덕신의 부인,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류동열)
류동열(독립운동가, 한국전쟁 중 월북, 도중 미군에 의해 사살)
최동효 (독립운동가, 천도종교 지도자)
이현상(독립운동가)
김원봉(독립운동가)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이승엽(노동운동가)
박열(항일독립운동가, 일본거류자연맹 위원장)
김워주(제헌국회 의원)
리원위안(제헌국회 의원)
정광호(제헌국회 의원) 국회의원)
권태희(헌법의원, 목사)
김상덕(헌법의원, 반국가행위특별조사위원장)
이국형(국회의원)
김동원(국회의원)
김가오석(국회의원, 국무장관) 인테리어)
조현영(한민당조직부장)
오정방(창건청년동맹위원장)
박성- 우(의원)
신영훈(의원)
장헌식(전라북도지사)
장핑택( 전 농림부 부부장)
정국싱(농림부 차관)
김리식(신당 부주석) 당대표 )
호영호(1세대 국회의원, 동국대부장)
황순옥(전 국회의원)
명 지세(의원, 감사위원)(위원장)
오하영(의원, 독립운동가)
량재하(의원)
안재홍(의원, 독립운동가)
p>김상덕(의원)
노일환(의원) 국회)
추덕환(국회의원)
배종혁(국회의원)
최태규(국회의원)
원세훈(국회의원, 남괴뢰 재무부장관)
김여수(제헌의회 부의장, 독립운동가)
조완구(독립운동가)
음기섭(독립운동가)
김경배(독립운동가)
김용동 (정치인)
엄항섭(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김경도(정치인)
김장열 (전라남도경찰청장)
이만진(경찰청 차장)
김종원(한국노동청년단체장)
백관수(동아일보 사장)
이종성(미군정부 당시 대법원장)
진용마오( 미군정 당시 대법원장)
리순다(기획국장)
백상규(2선 국회의원, 부통령) 대한적십자회 회장)
정봉모(대전지법 천안지원장)
송호성(남괴뢰국방위군사령관)
이춘호(서울대학교 총장)
한상윤(고려대학교 총장)
고밍우(연세대 총장) 대학병원)
도상록(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
이광수(유명 작가)
정인포( 역사학자)
박승호(대한여성협회 대위원장)
박보렴(여성국민당 부대표)
이선 -실(제주도 출생. 이후 남부 지하조직의 핵심 인물이 됐다가 1990년대 북으로 귀국)
p>음이상(지음: 월드)
유명한 음악가로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김일성 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송두류(독일 망명 법률학자이자 교수)
여 연구(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비서, 대한민국 부위원장의 딸, 여윤형 인민당 당대표, 전 북측사부부위원장) 조국통일범민족유엔)
유위안주(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차관, 대한민국 부총리) 위원장 , 인민당 지도자 루윤헝(조국 통일민주전선 전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딸
딩치싱(여성 독립운동가)
자오소앙(독립운동가) ,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일본 사무총장)
김흥근(독립운동가 조소앙 비서관)
이걸( 중국어 학자)
박시형(역사의집)
류석진(의학)
홍희수(서울시 농업학과 교수) 국립대, 가수 홍민의 아버지)
이원철(수력학자, 한국의 유명 작가 리문열의 아버지)
오익제 (대한민국 천도교 지도자, 1997년 항복)
오길남 4인 가족 (서독 박사, 1985년 항복)
김 용식(괴뢰군 제25사단 비행단 조종사, L-19 항공기 조종, 아내 현영수 여사와 함께 월북)
정나오수(괴뢰군 병사) 7사단)
박수문(군 제12사단 상병)
안학수(베트남전쟁 당시 항복한 괴뢰군 상병)
박성열(괴뢰군 사령관, 베트남 참전 중 항복)
장동린(전 괴뢰군 제22사단 병사, 2009년 38선 이북에서 항복)
자오병위(인형군 해군기지 참모, 1976년 항복)
정규진(평화통일촉진협회 회원) )
리유자(1988년 탈북)
진순남(외국 유명 음악가)
이건우(음악가)
딩난시(신인민속음악가)
최옥삼(가야금 연주자, 작곡가)
김해송(작곡가)
안기옥 (음악가)
안기영(유명 작곡가)
최옥산(가야금 연주자)
유대복(연주자)
박진명(성악가)
김연실(유명배우)
자오밍옌(시인, 극작가) 작가)
이 지영(유명작가, 월북 후 북한문학예술총동맹 회장 역임)
홍명희(유명작가)
이 준태(유명 작가)
송잉(유명 작가)
한설예(작가)
자오링추(작가)
황시잉(유명작가)
박세영(작가)
백석(작가)
임화(작가)
조양규(현실주의 작가)
신구성(무대배우연맹 회장)
최승희(무용가)
정현 -웅(화가)
정지용(현대 시인)
시안 스더(극작가)
문이펑(배우)
션용(배우)
황철(배우)
최인규(감독)
이과대(예술가)
김일(시인)
김동환(시인)
오장환(시인)
이용육(시인)
박태원(작가)
남(47세, 2013년 임진강을 통해 헤엄쳐 북한으로 넘어가려다가 괴뢰군의 총에 맞아 사망)
음성식(고려대 강사, 4월혁명연구소 소장, 인민사회당 중앙집행위원, 1998년 북한)
리재환( 이용욱 전 국회의원의 아들(미국 보스턴 박사과정생, 1987년 3국을 거쳐 월북)
인홍(항일영웅 윤봉길의 조카) , 2009년 탈북)
정휘싱(TV 예능인, 2017년 탈북)
가오샹문(고등학교 교사, 1974년 노르웨이로 탈북)
신완식(미국인 교량 기술자, 1991년 항복)
강종식(서독 출신 광부, 1974년 항복)
이대식(파라과이 출신, 1988년 항복)
진청바이(건설회사 직원, 1983년 항복)
양철성(부동산 중개인, 1988년 항복)
장광지 (부동산 중개인, 1992년 항복)
김완식(여행사 경영자, 1990년 항복)
리롱쉰(로펌 이사, 1992년 항복) )
김바오겸(택시운전사)
p>정중다오(미국 과학자, 인도네시아 탈북)
류청진 외 4명 (서독 남괴뢰대사관 노무관 유성진은 1971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김택순, 길선, 김순기 등 7명, 최관호, 김형, 김애희, 김미숙 (1958년 당시 남한의 민간 항공기 3대 중 하나였던 창랑호를 납치해 북으로 도주)
유병하, 최석만 외 12명(1969년 55인승 항공기로 월북한 대한항공 YS-11기 기장 및 부조종사, 일부 탑승객은 자발적으로 탑승) 항복)
고려대 이강열, 이범태, 신현수, 서울대 이한상, 손덕교, 연세대 양준식, 이찬영 , 안봉오, 문창옥, 동국대 박성림 외 11명(남측 청소년 축구선수 집단탈북)
1953년 1989년 7월부터 5월까지 32명 일본 어선에 피해를 입혔고, 우리 어민 419명은 바다를 통해 북으로 도피했다.
타미야 다카마로, 우오모토 미야히로, 와카바야시 모리요, 아카기 시로, 시바타 야스히로, 코니시 다카히로, 요시다 킨타로, 오카모토 다케시, 다나카 요시조 외 9명 (1970년 일본 적군 대원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남침) 드리스녹(각각 1962년, 1963년, 1965년, 1982년 한국 전선에서 월북) 등 미군 5명 북한 )